[우구미카] (to.머랭님)
+) 2016.07.20
+) 손 느린 저를 탓하세요(넙죽) 그런데 분명 키잡 키워드 주셨는데...이상하다 왜 내용에 키잡이 없지....(흐릿)
+) 스압주의...?
+)키워드:우구미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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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비젠의 땅을 다스리는 자는 매우 독특하였다. 여느 자들과 달리 뻐기거나 으스대는 일은커녕, 얼굴조차 잘 내비추지 않았다. 뛰어난 지주가 아닐지언정, 비젠의 거주민들의 걱정거리에 포함되지 않는 지주이기도 하였다. 무릇 아랫것이 모르는 웃사람이야말로 으뜸이라 하던가. 그러하다면 비젠의 지주는 매우 훌륭한 웃사람이 분명하였다.
비젠의 지주, 달리 부르길 ‘고비젠’이라 불리웠다. 현재 그 훌륭한 웃사람, 고비젠께서는 무얼 하시는가 하니, 한가로이 높은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봄을 알리는 연한 새싹에 그늘이 지면 저러할까. 파릇하면서도 진중한 녹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낮게 묶은 모습이 아름다운 사내였다.
고비젠은 무탈주의자였다. 안전주의자와는 달랐다.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무탈하다’고 여기는 방향을 전진했다. 타고난 운이 따른 탓인가, 지주가 향하는 방향은 늘 긍정적인 쪽으로 흘렀다. 물론 진행 과정에 일어난 일은 매우 ‘사소한 것’으로 치부, 별 것 아닌 듯 넘기기 일쑤였다. 아주 주관적인 판단으로.
차치하고, 고비젠이 고민하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간혹, 그가 고민에 빠지는 일이 생기곤 했다.
“고비젠님, 객이 오셨습니다.”
“으음?”
아래서 조용히 고하는 시종을 보며 고비젠, 우구이스마루는 고민했다. 객의 방문을 알리는 날이면 조용히 지나가는 일이 없던 탓이다.
“객?”
우구이스마루는 잠시 생각했다. 문득, 오래 전 홀연히 가출한 형제가 떠올라 반색했다.
“혹시 오오카네히라가 방랑을 마치고 돌아왔나?”
“미츠타다 도련님과 아오에 도련님이십니다.”
시종은 공손히 말을 잘라냈다. 우구이스마루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철없는 것.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내저었다.
“백부, 우리 왔어.”
사철잎을 닮은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매는 어린 것이 치기엔 요사스럽기까지 했다.
“무엇하러.”
일견 퉁명스레 느껴지는 말이었으나 아오에는 개의치 않았다. 우구이스마루의 관심은 늘 오오카네히라, 숙부의 행방이었다. 아마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겠지. 애초에 아오에는 우구이스마루의 태도에 썩 기대는 편이 아니라 상관없었다. 미츠타다는 별개인 것 같지만. 지금만 해도 제법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귀엽기는.
“숙부, 좋은 소식과 귀찮은 소식이 있는데.”
“둘 다 듣지 않아야겠어. 돌아가.”
우구이스마루는 고민하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아오에가 난처하게 눈썹을 내렸다. 아예 안 고를 줄이야. 이번 대답은 아오에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선택권이 없다지만 좋은 소식도 내치기야?”
“귀찮은 소식이 달렸다면 좋은 것만도 아닐테지.”
네가 물고 온 소식 중에 귀찮지 않은 것은 없었어. 우구이스마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차를 머금었다. 첫맛은 상쾌하고 끝맛은 달았다. 오늘도 좋은 차를 마실 수 있어 그는 행복했다. 태도에 신경 쓰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아오에는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아오에는 미츠타다와 함께 대청 쪽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 와중에 발소리는 없다. 우구이스마루가 차를 다시 머금었다. 아오에가 먼저 우구이스마루 앞에 앉았고, 미츠타다는 그 뒤에 머뭇머뭇 앉았다.
아오에가 도발하듯 우구이스마루에게 쏘아붙였다.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는 백부답지 않은데.”
“사소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저, 백부, 그래도 일단 숙부한테 온 연락인데.”
아오에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미츠다다가 작게 웅얼거렸다. 정원에 정적이 맴돌고, 시시오도시가 맑게 울렸다. 우구이스마루가 찻잔을 내려두고 몸을 돌렸다. 이야기를 듣겠다는 표시였다. 그럼에도 온화한 표정에 탐탁찮은 기색이 스몄다. 1
“원, 좋은 소식보다 귀찮은 소식이 걸리지만.”
어쩔 수 없지. 오오카네히라의 소식이라면. 우구이스마루는 고개를 까닥였다. 아오에는 심퉁한 얼굴로 편지를 하나 꺼냈다.
“편지가 왔어. 백부가 그렇게 기다린 숙부 편지.”
“그 아이는 어찌 네게 편지를 보냈다니. 뭐, 이도 그 아이답구나.”
아오에가 시종에게 편지를 건네고, 시종이 공손히 우구이스마루에게 그것을 전했다. 바스락거리며 종이가 열리고 우구이스마루는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그것을 읽었다. 시시오도시가 따악, 딱 울렸다.
우구이스마루가 편지를 내려두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오에가 이죽거리는 웃음을 띠웠다.
“백부, 숙부가 뭐래?”
“오오카네히라는 당분간 더 방랑할 모양이네. 그보다, 귀찮은 일을 떠안아야 한다니.”
“안 할 거야?”
우구이스마루가 물끄러미 아오에를 내려 보았다. 어린 얼굴에 이죽거리는 웃음이 영 얄밉다. 다 알고 물어보는 어리고 영악한 조카를 보며, 우구이스마루가 성의 없이 쥘부채를 펼쳤다.
“그 아이가 부탁한 걸 어찌 아니 들어주겠니. 곤란한 아이라니까, 오오카네히라는.”
언뜻 웃음기를 머금은듯, 혹은 무심한 듯 보이는 눈동자가 빛났다. 아오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츠타다는 조금 곤란한 듯 웃었다.
딱!
요상한 공기 사이로 시시오도시가 울렸다.
“해서, 어디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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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이스마루는 편지를 한 번 보고 고개를 들어 발 너머 그림자를 한 번 보았다. 편지와 발 너머를 번갈아보길 두어 번, 우구이스마루는 곧 의미 없는 행동임을 인지하고 그만두었다. 발 너머 그림자는 작았다. ‘그것’은 그림자 셋 중에 가장 작았다. 제법 어리다 생각한 아오에보다도 작아보였다. 우구이스마루가 쥘부채를 펴 입가를 가렸다.
“으음.”
오오카네히라의 부탁이라지만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저 작은 것을? 편지를 다시 내려 보는 우구이스마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참으로 귀찮은 일이 되었다.
어찌할까….
우구이스마루가 팔걸이에 몸을 가볍게 기댔다. 작은 그림자 뒤에 앉은 아오에와 미츠타다가 움찔댄다. 분명 제 마음을 짐작한 것이리라. 기실, 우구이스마루는 귀찮다 여긴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철회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매우 드물어 주변이 모를 뿐, 그 또한 꿋꿋하게 방랑을 고집하는 오오카네히라의 형제다운 면모가 그득했다. 드물게 그런 성질을 아는 것이 발 너머에 앉은 어린 조카들이다. 우구이스마루는 부채에 가린 입매를 빙그레 끌어올렸다.
“사흘.”
“?”
역시 내치자는 생각과 동시에 들린 목소리였다. 조카들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우구이스마루의 입이 닫혔다. 문득, 작은 그림자와 시선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짙은 어둠 속, 안개 낀 밤에 올려다보는 조각달이, 발 너머에 있었다.
“넉 달에 하루면 됩니다.”
“넉 달에.”
“하루?”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오에와 미츠타다 또한 어리둥절하게 말 조각을 되삼켰다.
“넉 달에 하루, 그렇게 사흘만 주십시오.”
묘한 목소리였다. 공기를 울려 귓속에서 웅웅 울리는 느낌이다. 우구이스마루는 눈을 잠시 감았다. 넉 달에 하루, 사흘. 허면 길어야 일 년 남짓이다.
“그리 하시면 달에 한 번, 그리운 이에게서 소식이 닿으실 것입니다.”
“한 해 남짓이란 말이로구나. 네가 이곳에 머무는 기한은.”
“맞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에게 사흘만 주시면 됩니다.”
“당신, 이라.”
오래도록 들어보지 못한, 아닌 호칭이다. 게다가 그리운 이에게서 소식이라. 분명 오오카네히라겠지. 편지를 들려 보낸 것도 그 아이일 것이다. 우구이스마루의 생각이 긍정으로 기울었다.
“좋아. 마침 오늘이 달이 시작하는 초하루구나. 그대는 넉 달에 한 번. 그대 말한 대로 초하룻날에 나를 찾아오려무나.”
발 너머 그림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얼굴조차 보지 않은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우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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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젠의 우기는 길다. 한 계절의 대부분이 비에 씻기고 쓸려간다. 때문에 우기는 모두가 출입을 금하고 집에 머물며 농번기를 대비한 준비를 하는 시기였다. 우구이스마루는 눅눅한 소매를 걷으며 차를 따랐다. 상쾌한 향이 번졌다. 끝은 달큼한 것 같기도 하다. 비젠의 특산물인 차를, 우구이스마루는 굉장히 사랑했다.
“백부, 바빠?”
아오에가 소매를 걷어 동여맨 옷차림으로 들어섰다. 돌아갈 틈도 없이 우기가 시작된 터라, 아오에와 미츠타다가 객으로 눌러 앉은 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우구이스마루의 성정을 아는 둘은 저택을 소란하게 만들거나 들쑤시는 일 없이 조용히 머물 뿐이었다. 눈치 빠르고 순종적인 아이는 싫어하지 않는다. 우구이스마루는 고개를 가벼이 까딱였다.
“무슨 일이니?”
“배달.”
아오에의 손에서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우구이스마루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런 날에 소식통이 나돌아 다닐 리가 없었다.
아오에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우구이스마루가 손짓하니 그제야 가까이 다가간다. 아오에는 세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길게 세 번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가 전해달래.”
“그?”
우구이스마루가 편지를 받아 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위로 흥미 어린 목소리가 떨어졌다.
“백부에게 사흘을 요구한 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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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는 석 달을 꼬박 채웠다. 그리고 땅이 마르고 불어난 강이 되돌아가기까지 한 달. 기실 우기는 넉 달이라 보아야 알맞은 기간이다. 우구이스마루는 땅이 적당히 마르고 수위 또한 정상으로 들어섰단 보고를 받고야 파종을 허락한 참이었다. 그가 힐금 시선을 옮겼다. 검으나 불그스레한 편지함이었다.
적송을 깎아 여러 번 옻을 칠한 상자는 매우 귀한 물건이다. 소금물을 먹여가며 말린 상자는 비젠의 오랜 우기에도 쉬이 뒤틀리지 않는 상등품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오오카네히라가 보내온 편지가 있었다. 오오카네히라의 연락은 매우 비정기적이었고, 받는 이 또한 들쭉날쭉했다.
그러나 ‘그’가 오고 나서 달라졌다. 그의 말 대로 오오카네히라에게서 편지가 정기적으로 도착했기 때문이다. 달에 한 번, 그렇게 세 통의 편지를 받았다. 잊을 만하면 편지가 도착했다. 그 또한 말했던 것처럼 아랫것들 수군대는 양, 방 밖으로는 나서지 않는다 하였다. 조용한 것이 우기 동안 내려앉은 눅눅한 습기와 같은 이였다. 물론,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야 나은 일이다만.
“백부.”
“음? 미츠타다인가.”
미츠타다는 제법 키가 자랐다. 삼나무라도 되는 모양이다. 그는 넉 달 전보다 반 뼘이나 컸다. 분명 다 자라면 자신보다 더 클 지도 모른다. 우구이스마루는 새삼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가벼이 미소 지었다.
“네 번째 편지구나.”
“아, 응.”
“신기하기도 하지.”
어쩜 이리 늘 꼬박꼬박 맞추어 올까. 우구이스마루는 그리 말하며 우아한 손짓으로 편지를 받아 펼쳤다. 여상히 안부를 묻는 서문을 훑으며, 우구이스마루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늘 미츠타다, 너와 아오에가 편지를 가져왔지. 그와 자주 만나니?”
“…? 아니, 우리…라고 해야 할까. 일단 나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어. 아마, 아오에도 비슷할 거고.”
“그럼 편지는 어떻게 받아오니?”
“방 앞에 편지함이 있어. 달에 한 번, 갈 일이 없는데도 꼭 근처를 지나게 되면 편지함이 있거든. 작은 쪽지를 펼쳐보면 백부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적혀있어서 가져오는 거야.”
꼭 요상한 힘에라도 이끌린 것 같지. 미츠타다는 멋쩍게 웃었다. 우구이스마루는 천천히 편지를 펼쳐든 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구나.
“오늘이네.”
미츠타다가 그렇게 말했다. 오늘? 우구이스마루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우기가 끝나고 맞이하는 달의 첫 날이다. 농민들이 바쁘게 파종할 시기이나 고비젠이 바쁠 이유는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조카를 보니, 도리어 미츠타다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백부, 정말 잊었어?”
“무엇을?”
“객에게 찾아오라고 했던 날이지 않아?”
“—아.”
“아, 가 아니잖아, 백부. 무엇보다 그런 것에 철저한 사람이.”
“으음.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는 법이지.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거라.”
“사소한 일이라니.”
살다보니 백부에게 별 소리를 다 듣네. 미츠타가가 고개를 저었다. 늘 들어도 주관적인 ‘사소함’이다.
우구이스마루는 쥘부채를 쥔 채 고민했다. 어쩐 일인지 잊었지만, 미츠타다의 말이 맞다. 넉달에 한 번, 총 삼일을 내어주는 것으로 형제의 소식을 다달이 받지 않는가. 분명 밑지는 거래는 아니었다.
“어린 것이 밤에 찾아드는 취미는 없다만.”
“하…?”
미츠타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구이스마루를 보았다. 우구이스마루는 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를 방해할 생각은 없다. 미츠타다는 용무도 끝났겠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루로 나와 걸음을 옮기면서도, 미츠타다는 우구이스마루의 말을 곰곰이 되씹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미츠타다.”
“아, 아오에.”
“이번엔 네가 백부를 만나고 오는 길인가?”
“어쩌다 보니 그렇네.”
“그런데 영 표정이 떨떠름한 거 같은데. 백부가 또 뭐라고 했나보지?”
아오에는 손가락으로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꼬았다. 미츠타다는 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물었다.
“아오에.”
“응?”
“객, 말이야.”
“아아.”
“작았던가?”
아오에는 마루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며 고개를 기울였다. 미츠타다의 얼굴은 복잡해보였다. 아오에가 특유의 야살스러운 미소로 제 사촌 형제를 응시했다. 미츠타다는 그런 아오에의 웃음어린 시선이 늘 어색했다. 야살스럽다고는 하나 일순 싸늘한, 혹은 관객처럼 관찰하는 시선은 썩 오래 마주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형제, 묻고 싶은 건 확실하게 하는 게 좋아.”
“아니, 내가 지나친 생각을 하는 거라면.”
미츠타다는 딱 잘라 말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의혹이 있으나 그것을 섣부르게 입에 담을 것도 아닌 부분이다. 참, 멋없는 꼴이다.
아오에는 그런 미츠타다를 보며 빙긋 웃었다.
“때로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지.”
“?”
“미츠타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말할 땐 그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어.”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눈이 붉은 이채를 띤다. 미츠타다는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아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온후하게 웃어보였다.
“굳이 연관될 필요가 없는 부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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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이 소란스럽다. 당혹어린 목소리가 조곤조곤 흔들린다. 우구이스마루는 읽던 책에서 눈을 뗐다.
“제법 소란하구나.”
“송구합니다. 고비젠님. 방문을 위해 객을 치장 드리려 했으나 도저히 가신 길을 알 수가 없어….”
본디 저택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특히 그 주인의 지위가 낮지 않을 경우 예의의 일환으로 객을 치장한다. 우구이스마루가 꽤 쓸모없다 여기는 관습 중 하나였다. 다만 이렇게 객이 올 일이 없으니 굳이 부정적인 선례를 만들지 않은 것뿐이다. 하지만 누구도 모르게 객이 사라진 부분은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치장은 굳이 상관없지만, 누구도 행방을 알지 못하나?”
“지금 사람을 풀어 찾고 있습니다.”
“흠.”
오늘 방문은 없는 것이 될까. 우구이스마루는 어깨를 가벼이 으쓱였다. 약속이 미루어진들 객에게 약속한 일자는 지킬 것이다. 당일이 안 된다면 명일이어도 상관없었다. 기다리던 소식을 가져다준 객이다. 약속이 미루어진들 어떤가. 우구이스마루는 드물게 그런 생각을 했다.
만남이 미루어진다면 굳이 깨어있을 필요는 없다. 우구이스마루가 책을 덮었다. 공간을 분리하는 발을 걷으려는 순간,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향이 번졌다. 바람조차 멈춘 고요함이었다. 우구이스마루의 손보다 먼저 발을 걷어 올리는 손길이 있었다. 빛을 등지고 선 작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선을 가진 눈매가 마치 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오에보다 머리 하나, 아니 하나 반 정도나 작을까 싶다. 우구이스마루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차라도 마시겠니? 비젠의 차는 통증완화에 좋은 효능이 있어 약으로도 쓴단다.”
“감사히.”
한 달 만에 듣는 목소리는 여전히 묘했다. 우구이스마루는 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따르고 새로 차를 우렸다. 은근히 단 냄새가 번질 즈음, 차를 따랐다. 쪼로록, 맑은 소리가 잔을 채웠다. 객은 잔을 받더니 향을 삼켰다. 차를 마신 것은 아니나 향을 음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요상한 표현임은 숙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구이스마루는 객의 행동을 설명할 단어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고비젠님.”
침묵이 깨졌다. 안절부절 못하는 기척이 뚜렷하다. 시종은 송구한 듯, 마루에서 깊이 고개 숙여 빌었다.
“고비젠님, 죄송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객의 행방을 찾을 수 없어 여쭙습니다.”
“되었으니 물러가서 그대들은 쉬려무나.”
“고비젠님.”
“괜찮으니까.”
한참을 실랑이하며 달래고야 시종이 겨우 물러났다. 다시 주변이 고요해지고, 우구이스마루는 차를 삼켰다.
“요상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네, 그대.”
“후후후.”
객은 눈을 내리깐 채 웃었다. 작은 몸집이 늙은이처럼 웃으니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우구이스마루가 책상에 팔을 괴었다. 체통머리 없단 말을 듣는 자세였으나 잔소리할 이는 없었다.
“나에게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가 있겠지?”
“하하.”
찻잔을 든 객이 약간 고개를 까딱였다. 수긍하는 몸짓이었으나 질답 같이 아득한 대답이었다. 재미있는 치일세. 우구이스마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객을 관찰했다. 선이 섬세하다. 여성처럼 가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은 잘 정돈되어 윤이 흘렀다. 그림자가 얼굴의 반을 가렸으나 미태가 흐른다. 흔한 상은 아니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을 생각인가.”
객이 찻잔을 돌리며 빙긋 웃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유독 선명했다.
“이유가 필요하니? 당신에게.”
“썩 불손하네.”
“그 또한 중하지 않으면서.”
객은 노래하듯 가벼이 말한다. 그러나 의중은 우구이스마루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우구이스마루는 흥미가 생겼다.
“날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우구이스마루의 말에 객의 얼굴에 웃음기가 짙어졌다. 즐거워 보이는 듯했다. 객은 찻잔을 내려두고 소매로 입을 가렸다. 입술마저 보이지 않으니 얼굴은 완전히 가려진 채다. 마치 얼굴 없는 요괴를 보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나에 대해 짐작하는 만큼, 나 또한 당신을 짐작하는 만큼 알 뿐이지.”
우구이스마루가 눈을 깜박였다.
“그 뿐이란다.”
속삭이는 듯한 음성만이 맴돌았다. 어느새 객은 자리를 비운 채였다. 대접했던 차는 한 모금도 줄지 않았다.
그렇게 초하루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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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이스마루가 정원을 응시했다. 객과 만난 초하루 이래로 석 달하고도 스무 날이 흘렀다. 그 사이 미츠타다는 오사후네의 땅으로 돌아갔다. 아오에만이 당분간 더 머무르겠다 청한 상태였다.
비젠의 농기는 순조로웠다. 우기로 기름진 땅에 속속들이 싹이 길게 자랐다. 큰 변수가 없는 한 풍년이 되리라. 고비젠의 저택은 한가로웠다. 우구이스마루는 지루할 때마다 형제의 편지함을 열어 의미 없이 그것을 읽곤 했다. 처음엔 객이 가져다주는 것처럼, 형제는 일정하게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달에 두 번은 오던 서편은 한 달, 석 달, 점차 빈도가 불규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빈도가 줄고 불규칙해졌지만 서편은 늘 도달했다. 그리고 서편조차 끊겨버린 날은 햇수로 삼 년이 되었다. 요사한 객과 함께 아오에가 들고 온 서편은 삼 년만의 소식이었다.
“녀석, 언제나 돌아올런지.”
슬슬 철없는 행동은 졸업해주면 좋으련만. 우구이스마루는 그렇게 생각하며 객이 찾아든 날을 돌이켰다. 기묘하다. 객을 설명할 단어는 그 외에 떠오르지 않는다. 괴이라고 설명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배냇물이 마른지 얼마 되지 않은 얼굴로 세월을 업은 노인처럼 행동한다.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소문은커녕 기척조차 내지 않는다.
슬그머니 궁금증이 일었다. 객이 방문할 둘째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날은 궁금증이 풀릴까. 우구이스마루는 작은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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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넉 달 후에.”
우구이스마루가 멍하니 객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넉 달 후? 사라진 기척을 쫓는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우구이스마루가 머리를 감쌌다.
객과 대화한 기억이 없다. 무엇을 했고 무엇을 이야기 했는가.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무엇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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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젠이 칩거를 시작한지 넉 달이 흘렀다. 식사조차 방에서 해결하며 두문불출했다. 시중인은 애타게 주인을 불렀으나 응답은 없었다. 다만, 고비젠이 머무르는 방이 객에게 내어준 별채라는 부분이 별 일이라 여길 부분이다.
바깥이 소란스럽지만 우구이스마루는 신경 쓰지 않았다. 즐겨 마시는 차를 입에 머금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마을에서 딴 찻잎은 늘 최고였다. 과장을 보태면 때때로 근심을 잊게 만들 정도로 우수했다.
“늘 차를 마시는구나.”
발 너머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빛이 들지 않게 겹겹이 친 발 건너에 그가 있다. 있을 것이다. 우구이스마루가 다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구나.”
“그렇구나.”
객의 말투는 묘하게 바뀌었다. 우구이스마루가 기억하는 객은 아주 작았으나, 지금 말투는 오래 산 노인과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우구이스마루가 말없이 차를 마셨다. 두 번째 만남에 어떤 대화가 이루어졌는지 알고 싶었다.
“알려주겠니?”
“무엇을?”
“기억나지 않는 대화 말이다.”
“하하, 어떨까. 그대가 약속한 초하루는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노여워하는 기색 없이 즐거운 음색이었다. 장난기 많은 아이를 보는 것만 같다. 우구이스마루가 다시 차 한 잔을 따랐다. 한참 조용하던 객이 입을 열었다.
“한 번쯤은 인심을 써도 되겠지. 무어라 한들 약속한 사흘째이니.”
차륵, 차르륵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천이 스치는 듯, 구슬로 꿰어 만든 발이 부딪히는 듯 몽롱한 음색이었다. 겹겹이 쳐진 발을 젖히고 객이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우구이스마루가 놀란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기억하는 객은 작고 어린 그림자였다. 그러나 지금 발 뒤에서 나온 객은 훌쩍 자라있었다.
늘씬하게 뻗은 몸이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였다. 어둑한 실내에서 그의 눈만이 희미한 듯 뚜렷한 금빛으로 빛났다.
마치,
마치 달처럼.
“자, 무엇이 궁금하니?”
객은 우구이스마루 앞에 선 채로 물었다. 우구이스마루는 객과 눈을 마주했다.
“오오카네히라의 편지를 어떻게 가져오는 거니?”
“나만의 소식통이 있단다.”
객의 시선이 잠깐 우구이스마루의 곁을 향했다. 그리고 다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가 가고 나면, 오오카네히라의 소식은 다시 오지 않니?”
“아마도. 그러나 내가 머문다고 한들 결과는 다르지 않을 거란다.”
“…….”
“물론, 머물 생각도 없지만. 하하하.”
우구이스마루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객이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다.
“그대는, 누구니?”
우구이스마루가 객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슴푸레 달이 빛난다. 객이 웃는다. 달무리처럼 흐리고 뚜렷하게.
“나는 미카즈키(三日月).”
“미카즈키.”
우구이스마루는 떠올렸다. 제 형제가 여행을 떠난 이유. 달을 찾기 위해서. 형제의 소식을 가지고 온 객은 달로써 이름을 대신했다. 미묘하게 비어있기는 했지만, 얼추 아귀가 맞아들었다.
“그래. 나는 미카즈키란다. 우구이스마루.”
객, 미카즈키는 한 번도 알려준 적 없는 그의 이름을 상냥히 불렀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우구이스마루의 가려진 눈에 입을 맞추었다.
“네 형제의 소원은 다 이루어졌단다.”
우구이스마루가 오른쪽 눈을 더듬었다. 애써 잊은 싸한 아픔이 번졌다. 뭉개진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 그럼 약속한 일자를 보냈으니 물러나마.”
“잠깐! 미카즈키, 잠시—.”
우구이스마루가 손을 뻗어 미카즈키의 소매를 쥐었다. 미카즈키는 온후하게 웃으며 몸을 낮추어 우구이스마루와 시선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 속에서 달이 반짝였다.
“우구이스마루. 나는 미카즈키(みかづき). 사흘(三日)만 머무를(付き) 수 있지. 단 사흘뿐이란다.”
달빛처럼 부드러운 온기가 닿았다. 떨어진다. 우구이스마루의 귓가에 미카즈키가 속삭였다.
“나를 찾으러 오렴.”
그리고 달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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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이스마루의 칩거가 끝났다. 객은 사라졌다. 아오에는 과자를 한 입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했지만 질문에도 시기가 있는 법이다.
아오에가 정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파리 끄트머리에 서리가 앉기 시작했다. 서서히 추워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비젠은 올해도 풍년이었고, 슬슬 한파를 대비하는 중이었다. 비젠의 시간은 비교적 뚜렷하게 갈리는 편이라 알기 쉬워 좋다. 아오에는 제가 다스려야 할 땅을 떠올리며 차를 삼켰다.
“도련님. 고비젠님께서 부르십니다.”
아오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냉큼 몸을 일으켜 우구이스마루가 있을 다도실로 향했다. 다도실에 들어가니, 우구이스마루는 평소와 달리 팔걸이도 없이 단정히 앉아있었다.
“백부, 팔걸이는?”
아오에가 자연스레 그의 앞에 앉았다. 우구이스마루가 잔을 새로 꺼냈다. 미리 우려 둔 것으로 보이는 연꽃차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백부, 원래 마시던 차는 안 마셔?”
“아아. 슬슬 질려가던 참이라.”
“질렸다고 안 먹을 수 있는 차던가.”
“뭐,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마.”
우구이스마루가 연꽃 냉차를 아오에에게 내밀었다. 무거운 말차나 비젠 특산차보다 연꽃차가 낫기는 하지만. 우구이스마루를 보니 그 또한 연꽃차를 마시고 있다.
“백부, 무슨 일이 있었어?”
“여행을 갈 거란다.”
“하?”
동떨어진 대답에 아오에가 얼빠진 얼굴로 백부를 보았다. 우구이스마루의 얼굴은 평안했다. 아오에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우구이스마루가 입을 열었다.
“비젠은 당분간 네가 다스려야겠어. 쥬즈마루에겐 서편을 보내두었으니 걱정 말고.”
“자, 잠깐. 백부! 너무 갑자기.”
“원래 모든 계기는 갑자기 일어나는 법이란다. 조카야.”
우구이스마루가 흔들림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오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우구이스마루는 다도실을 빠져나갔다.
아오에는 멍하니 손에 들린 연꽃차를 내려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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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이야기 해주세요!”
“이야기? 능숙하게 풀어내는 능력은 없다만.”
“저번에 해주신 이야기요!”
“맞아. 그거 해주세요!”
아이들이 코를 훌쩍였다. 청년은 웃으며 이야기를 떠올리는 척, 턱을 매만졌다.
“사이좋은 형제가 있었단다. 형제는 서로를 아꼈지. 그러나 아끼는 것과 별개로 동생은 꿈이 있었어. 그 꿈은 형제와 떨어지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지.”
청년의 목소리가 연기처럼 슬렁슬렁 흩어졌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청년의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동생은 길을 떠났단다. 형은 그런 동생을 배웅했지. 형은 마을을 떠날 수 없었거든.”
“어? 왜요?”
“맞아, 같이 가면 재밌었을텐데.”
“그치?”
“그렇네. 하지만 형은 아주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단다. 마을을 떠날 수 없었지.”
“에이, 동생보다 더요?”
“동생보다 중요하지 않지만 동생의 꿈보다는 중요한 일이었겠지.”
“우음, 어렵다.”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청년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벌써 이해하기엔 너흰 너무 어리지.”
“그래서요?”
“응, 그래서 동생은 어떻게 됐어요?”
“여행을 떠난 동생은 마을에 남은 형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단다. 당시에 머문 곳, 풍경, 사람들, 당시의 기분까지. 형은 동생의 편지를 보며 동생이 원하던 바를 이루고 오길 기다렸단다. 아주 오래오래.”
“얼마나 오래에요?”
“일곱밤?”
“바보야, 일곱 밤 아니고 스무 밤일거야.”
“아냐, 백 밤일 걸? 그쵸, 내 말이 맞죠?”
아이들이 서로 제 말이 옳다며 웅성댔다. 청년이 키득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아이들이 웅성대던 것을 멈추고 청년에게 다시 집중했다.
“아주, 아주 오래란다. 갓 태어난 강아지가 할머니가 될 정도는 되었을 걸?”
“우와, 할머니요?”
“그렇게 오래요?”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정도일 걸. 자, 자. 생각해보렴. 그럼 동생은 무얼 찾아 떠났을까?”
“뭘 찾아 갔어요?”
“뭐에요?”
“잘 모르겠어.”
“생각 안 해봤어요.”
“하늘엔 닿지 않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많지?”
“네!”
“동생은 달님을 찾으러 갔었단다.”
“달님을요?”
“만날 수 있어요?”
“거짓말. 엄마랑 아빠가 달님 별님은 너무 멀리 있어서 못 딴다구 했는걸.”
“맞아. 달님은 아주 멀리 있지. 그래서 동생은 아주 오래오래 여행을 해야만 했고.”
“동생은, 여행을 떠난 동생은 달님을 만났어요?”
왁자지껄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긴장어린 눈이 청년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야기의 끝은 늘 행복하다. 청년이 잠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묘하게 빛나는 눈매를 접으며, 청년이 속살거렸다.
“동생은, 달님을—.”
“요 녀석들! 이 시간이 되도록 안 들어오고!”
청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된 목소리가 울렸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아이들은 사색이 되어 쪼르르 도망가 버렸다. 청년은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낄낄 웃었다.
“도련님, 아이들에게 너무 무르신 거 아니유?”
“해 준 것도 없는데 무를 것까지야.”
“이야기를 조르는 대로 다 해주지 않수.”
“한다고 닳나.”
청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최근 청년은 마을 입구 어귀에 앉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늘 같은 이야기가 늘 같은 곳에서 끝을 맺는다. 아마 아이들은 그 끝을 영영 알 수 없겠지.
청년은 오른쪽 눈을 매만지며 웃었다.
“동생은 달님을 찾았고, 달님을 따라 집에 돌아왔지. 멀리멀리 돌고 돌아. 형제의 곁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형이 달을 찾으러 가 버렸으니.”
“도련님, 집에 안 가우?”
“아니, 가.”
청년은 어깨를 으쓱이곤 시중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끝은 풀리지 않겠지. 아마, 영원히.
- 시시오도시:일본 정원 장식물의 일종. 본래 짐승을 놀래켜 쫓기 위한 물건이었다. 일정량의 물이 대나무통에 담기면 통이 기울어 딱! 소리가 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