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헤시] RT이벤트-코쾅님
+) 2016.11.04
+) 하나마루 5화에 우구미카 주식이 터져서 한 RT이벤트용 리퀘입니다.
+) 키워드 : 이치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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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서없이 떠오른 잡념이 머릿속에 달라붙었다. 길지 않은 기간, 그것도 원정을 끝내고 귀가하는 길목이다. 평소라면 돌아가는 길목에 형제들의 선물을 살폈을 텐데. 말에게 몸을 맡긴 채 이치고는 상념에 빠졌다. 정말 어딘가 아픈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들러붙은 상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치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 푸른 낮이지만 신역의 밤은 빠르게 찾아든다. 분명 혼마루에 다가갈 무렵이면 짙은 어둠이 내린 상태일 것이다. 보고는 주군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하면 될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차례로 떠올리면서도 그 끝에는 결국.
그는 난감한 듯 입매를 매만졌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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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장소에 도착한 탓인가, 말은 연신 투레질을 해댔다. 이치고는 말의 목을 쓸며 달래보았지만 쉬이 진정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 마구간에 들어갔다간 다른 말들도 흥분하여 소란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예상보다 약간 늦은 터라 맞아주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말로 인해 억지로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치고는 여전히 투레질을 하는 말의 고삐를 잡아 끌었다.
“이랴, 네 원하는 대로 정원을 돌고 갈 테니 진정하렴.”
이치고의 말을 듣고야 만족했는지 말은 투레질을 멈추고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영특한 건지, 영악한 건지. 이치고는 어둑한 정원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구간으로 가려면 걷기는 해야 했으나, 말의 투정에 조금 더 걷는 길을 택했다.
이치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축축하게 닿는 향은 시간의 틈새, 흘러간 시간과는 다르다. 소리가 없어도 느껴지는 생기에 마음이 안정된다. 그런 이치고를 위로하듯 말이 얼굴을 부볐다.
이치고의 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마구간과 제일 가까우면서 건물 심층부로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는 방. 그 안에 그가 있다. 말은 멈춰버린 이치고의 등을 주둥이로 밀었다. 더 걷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이치고는 머뭇거렸다. 말이 불만스러운 듯 작게 투레질을 했다. 푸릉거리는 울음에서 불만이 가득했으나, 이치고는 마음을 굳혔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렴.”
푸히힝. 말의 불만 가득한 울음에 이치고는 각설탕을 하나 꺼내 말에게 물려주었다. 찹찹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어 번 발을 구른다. 이치고는 설탕을 하나 더 꺼내 말에게 물렸다. 투레질도 멈추고 발도 얌전하다. 이치고는 근처 나무에 고삐를 대강 매어두고 걸음을 옮겼다. 밤이슬에 젖어 사박거리는 수풀에도 몸이 긴장한다. 신을 벗어 마루에 올랐음에도 조용하다. 분명 이 회랑의 나무에서는 삐걱이던 소리가 났는데, 그 사이에 수리를 끝낸 모양이다. 방 안 기척은 없었다. 이치고는 무례임을 알면서도 조용히 장지문을 밀었다. 매끄럽게 열리는 문 너머로 난로의 훈기와 향이 희미하게 번진다. 그제야 이치고는 그 사이 꽤 추워졌음을 인지했다.
이치고는 어두운 방 안에 적응하기 위해 잠시 가만히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약하게 스며드는 빛을 등진 채, 이치고는 이부자리로 가까이 다가갔다. 누운 자리뿐만 아니라 숨소리조차 규칙적이다. 헤시키리 하세베라는 남사는. 이치고는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천사까지는 아니어도, 자는 모습은 충분히 유순했다. 늘 미간을 찌푸리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때에 따른 강약을 조절한다. 열정적이나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차갑다.
이치고는 무심코 손을 뻗어 억새풀 색이 스민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올이 굵어 장갑 너머로도 까슬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이치고는 고민했다. 장갑을 벗고 그의 머리를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기척에 잠을 깨면. 그렇지 않아도 긴 하루를 보내는 그에게 부담을 지우기는 싫었다. 그러나 만지고 싶다. 상반되는 마음에 고민하던 이치고는 결국 장갑을 벗지 못했다. 조심히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주고, 쓰다듬지는 못하나 가만히 정수리에 손등을 대었다. 새벽 어스름이 스몄다. 방 안으로 푸른 어둠이 내렸다. 새벽의 푸름은 생명을 생기 있게도, 없게도 만든다. 묘한 감성을 일으키는 색이다.
“하세베 공.”
푸른 어둠은 잠든 하세베를 시체처럼 창백한 낯으로 보이게 했다. 이치고는 하세베의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슬슬 일어서지 않으면 의도치 않게 깨울 것만 같았다. 이치고는 방금 전까지 하세베의 머리를 만지던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손바닥에 코를 대니, 희미하게 송진을 태운 냄새가 났다. 이치고는 엄지로 제 입술을 한 번 쓸었다.
“아침 식사에서 뵙겠습니다.”
이치고의 엄지가 하세베의 입술을 스쳤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치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한 줌 남은 어둠마저 물리려는 듯, 말의 울음소리가 번졌다.
이제 곧, 해가 밝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