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09.27


+) 실질적으로 이렇게 포대기와 야만바기리(두번째)의 구분이 지어졌습니다.


+) 만바사니는 여러 엔딩이 있겠지만, 초기도가 부러진 시간축의 만바사니는 이런 식으로 끝맺음 됩니다.


+) 어떤 의미로는 포대기는 영원히 포대기로 남게 되었네요.


+) 앞으로 올라오는 만바사니는 아마 호칭으로 구분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중간에 관계 묘사가 있는데 정말 한문단이라 어쩌지 고민하다 일단 열어둡니다.. 


+) 만바사니 기반 소우사니, 카센사니, 카슈사니 포함




= = = = = = = = = = = = = = =


18.09.09

[만바사니] 백중맞이



그녀는 문득 잠에서 깼다. 그녀는 누운 채 몸을 길게 쭈욱 뻗었다. 정신은 들었지만 여전히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언제 덮었는지 모를 이불에 몸을 구기듯 웅크리니 극락이 따로 없다. 게으른 정부가 일을 한 덕인지, 계절이 순식간에 바뀐 탓인지 모르겠지만 거짓말 같은 더위도 슬슬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조만간 여름 이불을 정리해야지. 그녀는 졸음에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생각했다. 졸음에 반쯤 걸친 정신이 몽롱했다. 그 와중에 장지문 바깥으로 기척이 소란스러웠다. 덕분에 꾸벅 졸다가도 기척에 흠칫 놀라며 잠을 깼다.


어쩐지 더 자면 안 될 것 같은데, 도와주어야 할까. 아니, 언제부터 바지런히 도왔다고. 상반되는 생각이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소란이 잦아드니 점점 일단 자고 생각하자, 로 생각이 기울 즈음이었다.



“실례합니다~.”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장지문이 열렸다. 볕을 보면 잠은 깨지도 않으면서 자지 못할 것이 빤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경쾌한 목소리의 주인은 보지 않아도 카슈 키요미츠다. 그는 수행을 다녀온 뒤로 묘하게 달라졌다.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무언가지만, 좀 더 친근하게 군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이불을 몸에 둘둘 감다시피 하며 몸을 웅크렸다.


카슈는 이불 도롱이가 된 그녀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붉은 눈에는 그녀를 향한 애정이 담뿍 스며있었다.



“주인, 잘 잤어?”


“몰라….”


“식사는?”


“나중에…?”


“더 잘 거야?


“엉….”


“그러면 다른 방에 가자.”


“귀찮은데….”


“그래도 자려면 지금 움직이는 게 좋을 건데.”


“귀찮아….”


“오늘 소란스러워서 여기 있으면 잘 못잘 건데. 내가 업어줄게. 응?”


“오늘따라 왜 그래, 정말….”


“주인은 그대로 있어. 내가 옮겨줄테니까. 알았지?”



카슈는 그녀를 이불 채로 번쩍 안아 올렸다. 그녀가 이불 속에서 무어라 웅얼거렸으나 카슈는 들리지 않는 척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품에 안은 이불뭉치는 저항 한 번 없이 얌전했다.



오늘은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길게 잠들길 바라. 카슈는 빙긋 웃으며 그녀 모르게 이불 위로 입을 맞추었다.




>




기억나지 않는 꿈을 꿨어. 뭐가 달라졌는지 모를 꿈이었어.

이렇게 더운 날이었고, 네가 있었고, 그리고….


있잖아, 포대기야. 네 얼굴이 흐릿해.

네 체온은 여름 볕보다 뜨거웠는데 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아냐, 사실은 기억해.

하지만 기억하면 안 돼.


자주 보면 흐려지잖아. 지워지잖아. 그래서 밀어놨어. 떠올리기 싫어서 밀어뒀어.

어차피 이젠 아무도 모르는데. 너랑 나만 아는데, 네가 없잖아.


내 기억이 흐려지면, 지워지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잖아.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 다른 기억이 쌓이면 네 기억이 밀려나면 내가 찾지 못할까봐,

그래서 아무것도 안 했어. 새로 기억을 쌓기 싫었어.


이런 내가 한심해? 역시 한심한가?

너는 그 날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짐작 같은 건 소용이 없어.


네가 말해주지 않았잖아. 결국 난 네가 뭐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평생 알 수 없어.

앞으로도, 계속 알 수 없겠지?


나쁘다. 너 참 나쁘다. 그런데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포대기야.




>




이승을 떠난 이가 현세에 돌아올 수 있다는 날이 있다. 머나먼 저승길에서 굽이굽이 돌아와 현세에 남은 사람을 보고 다시 저승으로 돌아간다는 백중. 혼마루는 굳이 따지자면 저승과 이승의 틈에 위치했기에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 좀 더 친숙한 공간이다. 단, 신격이 흐리거나 허락받지 못한 이들은 들어올 수 없다. 때문에 혼마루 안에서 일부러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는 한, 허락받지 못한 영혼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물론 예외는 존재하나, 그러한 예외가 위험하다 판단될 경우 자체적으로 제거되곤 했다. 백중은 절분과 함께 남사들이 길 잃은 혼백을 파리처럼 쫓아내기 바쁜 연례행사에 가까웠다.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되는 행사이건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맘때가 되면 말없이 백중을 준비했다.


맞이하는 날은 날래게 오라고 오이로 말을 만들고, 가시는 날은 한시한초가 아까우니 느리게 가라며 가지로 소를 만든다. 소우자 사몬지는 정령마의 다리가 될 나무대를 쥐었다. 상처 없이 매끈한 오이와 가지를 보며 손을 망설였다. 소우자의 손이 방향을 잃고 머뭇거릴 때, 카센 카네사나는 태연히 오이를 쥐어주었다. 소우자는 카센과 제 손에 쥐인 오이를 번갈아 보았다. 카센은 웃고 있었다.



“괜한 생각이야.”



마치 소우자의 생각이 훤히 보인다는 표정이었다. 소우자는 손에 들린 오이를 꾹 쥐었다. 수행을 다녀온 이들은 모두가 저러했다. 주인의 모습에 가슴을 쥐어뜯던 이들이 한둘이던가. 그러나 그들은 수행을 다녀온 뒤로 바뀌었다. 대체 수행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직 수행을 떠나지 못한 소우자 사몬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오이에 기계적으로 대를 꽂아 넣던 손이 멈추었다.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는 마침 수행을 떠난 참이었다. 그 또한 수행처에서 무언가 보고 오는 것일까. 과거라는 것을 그리 쉬이 떨칠 수 있는 것이던가. 물건에 새겨진 그 시간을,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뒤로 할 수 있는 것일까. 소우자는 완성된 정령마를 쟁반 위에 올렸다. 반듯하게 선 푸른 몸체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 같았다.



“지독한 사람.”



소우자는 한탄했다.



“그 또한 품어야할 모습이니.”



카센은 쟁반 위로 정령마를 내려두며 곱게 웃었다.



“어차피 그리는 이와 나란히 설 수 없으니, 이 정도야 너그럽게 굴 수 있지 않겠니.”



그대도 곧 알게 될 거란다. 카센은 소우자에게 속삭이며 웃었다. 소우자는 그런 카센을 차마 마주하지 못한 채 다음 오이를 집어 들었다. 과연 이 정령마를 타고 달려올 이는, 그녀가 이 혼마루에 초대할 영혼은 누구일까. 소우자는 답을 알면서도 오답이었으면 했다. 차라리 쉬이 뒤덮일 흔적이라면 그녀가 자신을 떠나보냈으면 좋겠다. 과거에서 다시 돌아온 자신은 저들처럼 오롯이 그녀만을 위한 검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소우자는 그녀가 차라리 이 괴로움을 두고 올 장소로 자신을 보내주길 간절히 바라며 정령마의 목을 몸통에 꽂아 넣었다.




>




그녀는 문득 눈을 떴다.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볕. 수국잎 끄트머리가 말릴 정도로 꽤 오래 비가 오지 않은 날이었다. 혼마루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날씨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방법을 몰랐을 시기이기도 했다. 그 꿈이다. 깨어나면 기억도 못할 꿈. 다른 점이 있다면 평소와 달리 눈꺼풀도 몸도 매우 가벼웠다. 가벼운 눈꺼풀을 끔벅이다 몸을 일으켰다.



“자는 줄 알았는데.”



하얀 천이 빛 아래 흔들렸다. 눈이 부셔 눈가를 찡그리니 그는 몸을 황급히 낮추었다. 마루 위로 쟁반을 내려두자마자 그녀의 눈가를 매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여름의 더위인지 그의 열기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얼굴이 추레하지 않기를 막연히 바라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하얀 천 아래로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뚜렷하다. 그녀의 마음이 술렁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눈동자다. 지금은 없어진 색깔.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녀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주인.”



그는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스르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움직임에 그가 멈칫했다. 주인?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포대기야.”


“어디, 아픈 건가? 그, 내가 무언가 주인에게 잘못한 건가?”



다르다. 이렇게나 다른데 애써 묻어두었다. 어깨에 기댄 그녀에게 혹여 문제라도 생겼나 전전긍긍하는 목소리가 이렇게나 오롯한데. 그녀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아니, 그런 거 없어. 잘못한 거 없어.”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 잘못은 그를 잊으려 한켠에 기억을 밀어둔 그녀 탓이었다.


목덜미와 허리 아래가 후끈거린다. 이렇게 선명한 감각을 어찌 잊었을까.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그 또한 눈가가 붉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에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가만있질 못했다.


그녀는 그가 가져온 쟁반에 놓인 컵을 들었다. 차가운 매실 냉차가 담긴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그녀는 매실냉차를 벌컥 들이켰다. 호쾌한 기색에 놀랐는지 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찬기가 남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쥐고 냉기로 얼얼해진 입술로 그에게 입맞추었다. 돌발행동 탓인지, 입술에 남은 냉기 탓인지는 모른다. 그는 이내 그녀의 어깨를 쥐고 그녀와 혀를 얽었다. 냉기는 거짓말처럼 천천히 그의 열을 식혔고, 다시 열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뒷목을 자연스레 쥐고,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가파른 호흡에 겨우 떨어진 입술이 빛났다. 그의 귀가 붉게 타올랐다. 그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 힘은 예상보다 억셌고, 그녀는 바보처럼 웃었다.



“…주인, 한 번 더…하고 싶어.”



그, 야만바리기 쿠니히로는 얼굴을 가렸던 거적이 벗겨진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다. 과거에 없었을 일이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녀의 허락과 동시에 야만바기리는 그녀의 뺨과 입술에 입맞추었다. 어차피 깨어날 것을 알면서도 지금이 더 지속되길 바랐다. 그새 미지근하게 식은 입술이 매끄럽게 맞닿는다. 한 번은 두 번이 되었다. 그가 그녀의 몸을 훑기 시작했다. 그것은 입술이기도 했고, 손이기도 했다. 흐트러진 매무새 아래로 그녀의 몸이 여름 볕 아래 환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야만바기리의 셔츠 안을 더듬었다. 그에 불이 붙은 듯, 야만바기리의 손이 다급해졌다. 그녀의 다리가 열림과 동시에 그의 성기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흥분으로 빳빳해진 성기가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뿌듯하고 버거운 감각이 매끄럽게 밀려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그녀의 포대기를 마주 끌어안았다.


매미소리조차 없는 고요한 여름 낮. 그녀는 야만바기리와 관계를 맺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혼마루 마루 위에서, 몇 번이고, 그렇게.




>




카슈는 본채의 소란이 닿지 않을 별채에 온 참이었다. 며칠 전, 그는 그녀를 이불과 함께 든 채 방으로 들어섰다. 별채의 방은 여전히 깨끗하고 볕이 들어오지 않아 시원했다. 그는 방 한가운데 깔린 요 위로 누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깰까 매우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방에 들어왔다. 카슈는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르내리는 가슴께가 아니었다면 시체로 보일 법 했다. 그만큼 그녀의 육신은 고요했다.


카슈는 정좌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쯤 그녀는 원하는 꿈길을 걷고 있을까. 그녀가 초대하지 않은 이상 자신은 그녀의 꿈을 엿볼 수 없다. 카슈의 시선이 문득 방 한구석에 닿았다. 서찰 보관함이 삼단 선반에 빼곡하게 놓여있었다. 그녀가 콘노스케를 통해 보냈던 편지였다. 받을 이 없는 편지는 콘노스케가 다시 물고 돌아왔다. 소우자 사몬지는 돌아온 편지를 받아 아무도 찾지 않을 방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나라면 흔적도 없이 태웠을 텐데. 카슈 키요미츠는 눈을 내리깔며 생각했다.



“주인, 원하는 꿈을 꾸고 있어?”



카슈는 그녀의 몸 위로 엎드렸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다만 화답하듯 숨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오늘 양보해주었으니까, 데려가면 안 돼. 알았어? 카슈는 주어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호흡이 조용히, 느리게 번지기 시작했다. 이불 아래 그녀의 손을 찾아 쥐니 한겨울 언 손처럼 차가웠다.



“주인, 따라가면 안 돼.”



카슈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주문을 외듯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았을까. 카슈는 그녀의 손을 다시 한 번 강하게 쥐었다가 놓았다. 슬슬 백중을 맺기 위한 배웅을 도우러 가야 했다. 카슈 키요미츠는 몸을 일으켰다. 진짜 안 돼.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부디 그녀가 제 말을 들었길 바랄 뿐이었다.




>




꿈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만큼 촉감은 생생했다. 따갑게 떨어지는 볕, 무거운 공기, 맞닿은 열기. 꿈으로 치부하기엔 뚜렷한 감각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숨을 헐떡였다.



“그…, 미안.”



기진맥진한 그녀 위로 사과 한 마디가 뚝 떨어졌다. 그녀가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열기에 벌겋게 익은 피부와 푸른 눈동자가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그녀가 기진맥진한 이유는 야만바기리 쿠니히로의 탓이기는 했다. 부추김은 그녀가 먼저 시작하긴 했지만.


열기에 젖은 시간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좋았다. 이렇게 좋은 게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픽 웃었다. 같이 뒹굴었는데 사과가 무슨 말인지. 그녀는 손을 뻗어 야만바기리의 손을 쥐었다. 저보다 큰 손이 빠듯하게 잡혀들었다.



“왜 사과해?”


“주인을 힘들게 해서…?”


“의문형이네.”


“…….”


“왜 네가 사과를 해. 같이 어울리자 꼬신 건 난데.”


“그래도 힘들어하니까‧….”


“포대기야.”



그녀가 그의 손을 당겨 제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행동에 야만바기리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방금 전까지 이보다 더 한 짓도 했는데 쑥맥이 따로 없다. 그녀가 푸스스 웃었다. 꿈속이라 그런지 웃음이 마냥 헤프게 흘렀다.



“포대기야.”


“……응.”



그녀가 추궁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아챈 그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초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눈동자가 하얀 눈꺼풀에 깜박, 깜박 숨바꼭질을 했다.



“포대기야.”


“응.”


“후회한 적 없어?”


“무엇을?”


“그냥, 여러 가지.”



드물게 튀어나온 속내였다. 야만바기리는 눈을 끔벅였다. 평소보다 둥글게 느껴지는 푸른 눈이 퍽 순해 보였다. 야만바기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망설임 하나 없이 단호한 몸짓이었다.



“그럴 리가.”



야만바기리는 그녀에게 쥐인 손을 뒤집어 잡으며 속삭였다.



“당신을 만난 이래로 나에게 후회란 없어.”



단호한 목소리는 곧고 단단했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말로 나오지 않은 마음이 어떤지 알 게 무언가. 그녀는 독심술은 할 줄 몰랐다. 때문에 내심 두려웠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웠고, 듣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그녀의 초기도, 첫 검이 품은 마음이 말로 화하길 바랐다. 그의 말에 가슴이 찔린다 해도 듣길 바랐다.


야만바기리의 입술이 달싹였다.



“주인, 나는 당신을.”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녀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정사만한 열기를 머금지 못한 입맞춤은 미지근하고 버석했다. 푸른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그녀는 숨이 오가는 거리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괜찮아.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 입에서 완전히 나오지 못한 그 말은, 그에 따른 불안감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여태껏 기억에서 도망치고, 되돌아보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도망치게 될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다.



“내 포대기.”



그녀가 속삭였다. 또렷하지만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야만바기리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야만바기리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다시 말했다.



“좋아해, 포대기야.”



선물이야. 소 모는 청년이 사랑하는 이를 머나먼 강 건너에서 그린다고 했다. 보고프고 그리운 감정이 흘러 은하수가 된다면, 이는 까치와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도 평생 강을 건널 엄두가 나지 않으리라. 흐느낌 사이로 그녀의 마음이 흘러내렸다. 야만바기리는 그녀를 마주 안았다. 느리고 조심스러운 포옹이었다.



“주인.”



그녀의 손이 야만바기리의 천을 쥐었다. 흐느낌을 참으려 입술을 물었지만 새어나오는 울음은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이별을 예감했다.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소 모는 청년과 베 짜는 여인처럼 매해 한 번쯤 만날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이후로 그와 그녀의 시간은 완전히 어긋날 것이다. 그녀는 미래의 인간이기 때문에 이 꿈에 더는 머물 수 없었다.



“주인.”



야만바기리의 목소리는 당황을 머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달래려 등을 도닥였다.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품이 푹 젖도록 울었다. 저 멀리 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야만바기리도 들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았다.


움머어어—.

음머어어어어—.



“주인?”



야만바기리를 끌어안은 손의 힘이 흐려졌다. 소가 재촉하듯 음머음머 울었다. 길게 메아리치는 소리가 멎기 전에 헤어져야 했다.



“내 포대기.”



눈물 젖은 얼굴은 매우 흉하겠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고 웃어보였다. 소의 울음이 멀어진다. 그녀의 몸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야만바기리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듯 흐려지는 그녀의 팔을 쥐었다.



“주인?!”


“내가 정말 널 좋아해.”


“주인!”



소 울음이 길게 늘어졌다. 메아리치는 소 울음이 흐려지며 그녀의 몸도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흔적도 없이 흩어진 허공 위로 야만바기리의 단단히 쥔 주먹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걸음의 주인은 본성과 반 식경 정도 떨어진 별채의 마루로 거침없이 올랐다. 그는 길게 내린 대나무 발을 젖히고 방에 들어섰다. 방은 여름 끝자락에도 얼음 창고마냥 서늘했다.


방 가운데 놓인 요, 그 위에 누운 사람. 거짓말처럼 그녀가 눈을 떴다. 그는 이불 곁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인.”



보다 단단해진 푸른 눈동자가 곧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초점조차 보이지 않는 검은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빳빳한 고개를 수그렸다. 그녀가 손을 뻗어 고개 숙인 금발을 쓰다듬었다.



“어서와."


—야만바기리.




>




뚝.



가지로 만든 정령소의 다리가 부러졌다. 다시는 어디도 갈 수 없다는 듯, 그렇게 고꾸라진 정령소는 불단에서 떨어졌다.


거짓말처럼 뭉그러진 가지소는 고요히 백중의 끝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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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달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