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라이들은 사랑입니다.
+) 이시키리는 또라이가 아니라 변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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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야겐+미카즈키(15.08.07)
몸이 나른하다. 본래 몸을 잘 안 쓴다고는 했으나 무기력감이 늘었다. 잠은 잘 참는 편이라고 여겼다. 잠깐 눈을 깜박였다고 생각했을 때, 길어야 두시간 정도라고 생각했다. 실상 마주한 것은 저녁식사를 알리는 고코타이의 부름이었다.
간만의 단잠이기도 해서 썩 이상하다 여기진 않았다. 그 빈도가 한 번, 두 번, 네 번, 여덟 번. 그렇게 늘어갈수록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짧으면 서너 시간, 빈도가 늘어날수록 그녀가 정신을 차린 시간은 줄어만 갔다. 덜컥 겁이 난 그녀의 곁을 지킨 것은 야겐이었다. 단도들의 형 노릇을 하는 그 또한 이상증세를 느꼈는지 그녀의 곁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제 몸에 이상증세가 있을까 저어된 그녀는 점차 방 밖으로 나서길 꺼려했다.
게으를지언정 도검들에게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전장에서 그저 잃기만 했을 그들에게, 적어도 눈앞에서 같은 기억을 주기는 싫었다. 때문에 그녀는 야겐에게 미안했다.
"대장. 오늘도 미다레들이 걱정했어."
"아. 응."
멍하게 누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야겐은 안경을 벗고 눈두덩을 눌렀다. 몸에 특별히 이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깨어있는 시간은 갈수록 손에 꼽았다. 문 밖으로 기척이 들렸다. 야겐이 눈짓으로 그녀에게 의사를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도 된답니다."
미닫이문이 열렸다. 밤처럼 검푸른 머리, 매끄러운 살결, 초승달을 품은 눈동자. 미카즈키 무네치카가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아가."
걱정 가득한 음색에, 그녀는 이유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이를 어쩌누.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뭐 하러 왔어요."
"아가가 영, 보이질 않길래 이리 왔단다. 응, 참으로 보고 싶었다. 아가."
아가? 그녀의 눈이 거짓말처럼 스르륵 감겼다. 고른 숨소리가 허공에 번진다.
야겐은 바닥에 내려둔 안경을 고쳐 썼다. 한참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미카즈키는 시선 한 톨 돌리지 않은 채 야겐에게 말했다.
"아가의 몸에 해가 가진 않는 게지?"
"..대장의 몸에 해가 있는 것을 쓸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야겐은 미간을 찡그리며 답했다. 미카즈키가 고개를 기울여 야겐을 응시했다.
"그리고 전, 애초에 당신을 돕는 것도 아닙니다."
야겐은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미소를 지었다. 반들거리는 유리알 너머로 검은 눈이 반들반들 빛났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대장의 곁은 제가 지킬 겁니다."
깊게 가라앉은 초승달이 예기를 발했다. 야겐은 어둡게 빛나는 달을 응시하며 빙긋 웃어보였다.
물론, 대장은 당신에게도 넘기지 않아요. 미카즈키 공.
04. 이시키리마루(15.08.11)
이시키리마루는 불단이 놓인 방에서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의복은 단정했으나 민낯이었다. 하루의 시작을 기도와 함께 시작하고, 눈가에 붉은색을 칠한다. 복을 기원하며 령을 베고 정화하는 신검다운 일정이었다.
축원을 마친 그가 경첩을 열어 머리를 단정히 정리했다. 작은 통을 열어 소지에 붉은색을 찍어 눈가에 흘리듯 바르니, 그야말로 사령을 쫓는 오니와 같다. 의관마저 단정히 쓴 그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여니 하늘이 어두웠다.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으나 흐린 하늘을 본 그가 빙긋 웃었다.
"이런 날이야말로."
이시키리마루는 잠시 고민했다. 밭, 부엌, 대련장, 도실. 어느 공간에 가야 원하는 이가 있을까. 그가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입술 위에 대고 가만히 숨결을 불어넣었다. 희미하게 흘러가는 공기의 방향을 잡은 그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군."
"어? 돌땡아."
그녀는 물장구를 친 모양이었다. 항상 귀찮고 덥다며 틀어 올렸던 머리가 자연스럽게 어깨를 타고 흐른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시선이 닿자, 이시키리마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자연스레 웃음 지었다.
"주군, 오늘도 홑겹만 입고 계시는군요."
"아, 여긴 녀석들도 없으니까. 더우니까 입겠다는데 엄마 잔소리가 엄청나니까 어쩔 수 없어."
지네들은 안 덥다 이거지. 그녀가 입을 댓발은 내밀고 툴툴거렸다. 발로 애꿎은 수면을 첨벙대는 그녀는 평소와 다른, 느슨한 분위기가 있었다. 습기 어린 머리카락 아래, 홑겹인 흰 천 아래로 비치는 살결에 시선이 향했다. 다른 검사들은 쉬이 볼 수 없는 풍경을, 그는 원정을 나가는 날이 아니면 이렇게 만끽하곤 했다.
그런 그의 눈에, 검은 그림자가 스쳤다. 그녀의 발목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분명, 흉을 일으키는 사령이었다. 크기는 작아도 그 질은 가히 좋지 않다. 그것을 필두로 그녀에게 검은 그림자가 끈적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마치 해조를 납작하고 길게 뭉친 것 같은 모양새로 그녀의 몸을 더듬는다. 발가락 사이를 타고 오르는 검은 그림자가 발목을 더듬고, 물기에 달라붙은 옷자락 아래로 스물스물 스며든다. 물기 어린 흰 피부를 타고 오르는 그림자는 그 색이 명확하여, 이시키리마루는 저도 모르게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저것은 불길한 것. 베어야 한다. 신검으로서의 본능이 그의 손끝을 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시키리마루는 본능을 억눌렀다. 처음이 힘들었을 뿐이다. 지금은 제법 수월하게 참을 수 있다.
그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얽매어, 물속으로 끌어당기는 그 때. 이시키리마루는 모른 척 뒤를 돌아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미끄러진 것처럼 가벼이 물에 빠진 그녀는 수초가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이시키리마루는 수확을 앞둔 농부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그녀가 빠진 못가로 다가갔다.
"이런, 이런."
주군은 참으로 덜렁이라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자신의 분신을 들어 수면을 길게 그었다. 검 끝에서 번지는 청량한 빛이 그녀를 붙잡고 있을 그림자를 벗겨냈는지 그제야 그녀가 수면으로 둥실 떠오른다.
이시키리마루는 미동조차 없는 그녀를 건져 안았다. 차가운 물이 그의 의복을 사정없이 적셨으나, 썩 거슬릴 일도 아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붙은 얼굴은 충격으로 새하얗다. 그것 또한 그에게 동하는 아름다움이라, 이시키리마루는 참으로 기쁘게 웃음지었다.
"주군. 걱정 마시지요. 내 언제든 주군을 구해드리리다. 모든 흉하고 악한 일로부터."
주군, 그대가 나만을 오롯이 의지할 수 있을 때까지.